지난 달, 달력 한장을 뜯어내고 나니 마지막 남은 달력 한장이 12월이라는 글씨를 선명하게 내보였다. 왠지 지금까지 맞이해왔던 12월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제 곧 방학이구나 하면서 미소가 지어졌던 지난날과는 달리 내 입가에는 쓴 웃음만 지어졌을뿐... 학생의 신분이라는 말로 아직은 어른이 아니라며 나 자신을 합리화 했던 어설픈 변명도 이젠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된다.
면접 보고 돌아오는 길, 깊어지는 한숨
회사는 '이런 것까지 적어야하나?' 싶을 정도로 나란 아이의 주민등록번호, 가족 관계, 성장배경, 나란 아이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이력서라는 종이 한장 위에 적어내라며 커서를 깜빡 거린다. 그리고 얼마 뒤, 수많은 회사들은 나를 만나보기도 전에 '능력있는 인재임에는 불구하나 더 좋은 회사에서 능력을 펼치시길 바란다'며 결론은 불합격인 장황한 문장을 내게 이메일로 보내온다. 처음에는 내가 왜?라는 질문이 들어 며칠동안 상처도 받고 자괴감에도 시달렸으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난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정지현씨는 왜 이 지원하셨죠? 별로 이 직업과 전공이 맞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정지현씨는 힘들게 살아 보신 적이 없나보군요. 힘든 경험을 쓰라는 질문에 이런 걸 적으시다니."
"여자는 이 분야에서 별로 반기지 않는거 아시죠?"
내가 살아온 지난 길을 거침없이 깎아내린다.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그 질문들속에서 나는 반사적으로 '나는 상처 받지 않았노라' 하는 내 마음과는 상반된 웃음을 지으면서 그럴듯한 대답을 한다. 하지만 냉랭한 면접관의 태도 너머로 '아. 이번에도 틀렸구나.' 쓰린 직감이 찾아온다. 끝까지 허리 굽혀 인사하고 돌아나오고 면접장 문을 닫고 걸어오는데 자꾸 헛헛한 웃음이 나온다.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난 아직도 부족하구나, 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서, 잘 할 수 있어서 지원한건데 정말 잘 해낼 자신이 있는데 사회에 출시된 나라는 '상품'은 너무나 초라하기만 하다.
집에 들어오면 내색은 안하시지만 올해로 정년퇴직이신 아빠도 그리고 요즘 다 큰 딸의 눈치를 살피시며 근심스러운 내색을 감추지 않으시는 엄마도, 그리고 "좋은 소식 있니? 지현아?"하면서 전화를 걸어오는 친척들의 전화도 자꾸만 나의 고개를 떨어뜨리게 만든다. 내가 우리집의 무거운 공기를 만들어 내는 주범 같다.
어린시절 그때의 나는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것이 나는 참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대학교 4년 동안 NGO에서 해외 인턴도 해보고, 과대도 해보고, 여행도 참 많이 다녔고,국제 포럼에 가서 나와 닮은 꿈을 가진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대학생 친구를 만나 즐거워하기도 했고, 방학을 다바쳐 손 하나에 카메라를 다른 한손엔 수첩을 들고 철새 망원경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통역과 번역 자원 봉사도 해보았고 과에서 1등도 2번이나 해봤고 에이스라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그 시절엔 무언가 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며 몰두하는 내 모습이 나는 좋았고 참 행복해 하루하루 아침이 오는 것이 즐거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내가 꿈꾸어 오던 어른에 가까워져가는 구나 내 자신이 대견스럽던 순간이 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의 10년 뒤 라는 주제로 그림과 내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꿀병안에 넣어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학교 어느 나무 아래 묻었던 것 같다. 23살이라는 그 나이를 훌쩍 지나쳤지만 내가 그 때 그렸던 나의 10년 뒤의 모습과 지금 나는 너무나도 달라 그때의 어린 지현이가 행여나 지금 나를 만나 실망하면 어쩌나 겁이난다. "언니는 왜 어른이 되지 못했나요?"내게 묻는 꼬맹이 지현이의 눈빛을 나는 마주 바라보지 못하고 피하게 될 것만 같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도 난 아직도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 누군가의 평가에 자꾸 휘둘리게 되고 신경쓰게 된다. '나 지금 잘하고 있는거니?' 누군가 나에게 대답해주었으면 좋겟다.
어렸을 때 보았던 백설공주의 새왕비가 요즘 자꾸만 생각난다. 예쁜 얼굴을 하고도 마법의 거울에 집착적으로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하고 물어보던 그 새왕비가 생각난다. 새왕비도 겉은 어른이지만, 강해보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 많이 흔들리던 그런 나약한 존재였나보다. '당신은 충분히 예뻐요.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하고 등을 토닥토닥 거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이에 못이겨 겉모습은 자꾸만 자라나는데, 세월은 마음까지 성숙시키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의 흐름이 빠르기만 한지 자꾸만 세월은 덜 익은 풋어른인 나를 세상으로 내몬다. 빨갛게 잘 익은 홍시인 줄 알았는데 한입 베어물면 떫어 배신감으로 물드는 땡감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되기 위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인 것만 같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과 거친 빗줄기을 온몸으로 겪어내어 열매가 영글듯이 난 더 많이 실패하고 주저앉고 배우면서,내 손안의 다른 것을 잃는 것만큼 성숙의 열매를 얻었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끝내는 옳고 그름을 자신있게 결정할 수 있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흔들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속까지 '진짜' 어른이 되었으면 나는 좋겠다.
Posted by 정지현(bg10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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