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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걸의 고백

 

최근에 생긴 별명이 하나 있어.  ‘앤트걸.’ 개미처럼 자기 몸보다 더 많은 일을 지고 낑낑거린다고 친구들이 지어 준 별명이야어감도 좋고, 뜻도 한눈에 들어오고. 또 마블에서 나온 히어로 중 한 명인 앤트맨생각나지 않아? 처음 들었을 땐 되게 좋았어. 열심히 산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그런데 내가 왜 앤트걸이 됐는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마냥 좋지는 않더라. 나는 진짜 앤트맨처럼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악바리 근성에, 끈질긴 거 하나는 끝내줘서 앤트걸 소리를 들은 게 아니었거든.

 

 

 

완벽이란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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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원하던 니나, 영화 <블랙스완> 중에서

 

 

내가 열심히 살았던 이유는 완벽하기 위함이었어. 내 등 위에 올려진 모든 일을 완벽하게 잘하려고. 일뿐만이 아니야. 매일 아침 하는 화장, 입는 옷, 몸무게, 말투, 표정, 과제, 성적, 취미,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까지도 나는 완벽해지려고 애썼어.

 

이게 뭐가 나쁜가 싶지? 어쨌든 노력하는 건, 완벽하다는 건 좋은 뜻이잖아. 가끔 자신이 완벽주의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소개되기도 하고. 근데 있잖아. 완벽해지려는 노력 끝에는 재미있는 어떤 일에 도전할 기회가 와도 하던 일이나 잘해야지, 하고 고개 돌렸던 내가 있었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한마디 꺼내기조차 두려워하는 나도 있었고. 완벽하게 화장이 깔끔하고 완벽하게 입은 옷들끼리 잘 어울린다고 느껴지지 않는 어떤 날의 나는, 외출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빠져 온종일 저기압이었지. 또 완벽하게 끝내지 못한 과거의 일들은 가끔 내게 악몽으로 찾아왔어.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들은 점점 많아졌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완벽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나는 점점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고 무기력해지기 시작했어. 모두는 아니겠지만, 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고개를 끄덕인 또 다른 앤트걸이 있을 거야. 그렇지?

 

 

 

분수를 너무 잘 아는 소녀

 

barbie-458618_1920우리 손에 붙들려 있었던 그 바비 인형

 

 

내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 어쩌면 36-18-33사이즈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바비 인형을 손에 쥐고 놀았을 때부터일지도 몰라. 나처럼 바비 인형을 손에 꼭 쥔 소녀들은 정글짐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기보다는 안전한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고, 학교 구석구석을 모험하는 것보단 얌전하게 종이접기를 하는 게 더 좋은 거라고 배웠지.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너무 잘 알았어.

 

그래. 그때부터였을까? ‘Boys be brave’와 같은 유명한 문장의 주어에 우리가 해당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용기는 우리에게 너무 먼 말이었어. 반면 완벽은 우리와 가까웠지. 내가 모르는, 미지의, 어려운 어떤 것을 하기보다는 내가 아는, 잘하는, 쉬운 것을 택하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어. 대신 ‘완벽하게’라는 조건을 걸고. 그런 것들은 점점 많아졌어.

 

 

 

앤트걸과 앤트우먼

 

malala파키스탄 여성 교육 운동으로 최연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말랄라, lounge.obviousmag.org

 

 

내가 방금 우리라고 했잖아. 정말 문제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야.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소녀가 앤트걸로 살았고, 지금은 앤트우먼으로 살고 있어. 1980년, 심리학자인 캐롤 드웩은 학교에서 5학년 아이들을 연구했대. 엄청 어려운 수학 문제를 애들에게 내주고 반응을 관찰했는데, 바비 인형을 놓고 연필을 잡은 소녀들도 그 대상이었지. 소녀들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빨리 포기했어. 아이큐가 높을수록 빨리 포기했지. 반면 소년들은 달랐어. 어려운 문제를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재미있어했다는 거야. 소녀들이 완벽하게 알지 못한 문제들을 대부분 백지로 채운 것과 달리.

 

소녀들이 크고 나서는? HP 보안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들은 구직 조건의 60%만 달성해도 지원서를 제출한다고 소개되어 있어. 반면 여성들은 100%에만, 그래, 그 완벽에 가까운 100%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지원서를 제출한다고 얘기해. 앤트걸들이 커서 앤트우먼이 된 거지. 완벽해야 한다는 덫에 계속 걸려 있는 채로.

 

이건 생각보다 되게 큰 문제야. 앤트걸들의 용기 결핍은 여러 부분에서 두드러지거든. 세계는 과학, 수학, 정치, 공학 등 많은 부분에서 여성 인재들의 부족을 말하고 있어. 애초부터 실리콘밸리가, 청와대와 백악관이, 노벨상의 후보 리스트가 남자들의 자리라는 법은 없어. 용기를 내서 도전하기보다 완벽하도록 교육받았던 앤트걸들이 애써 외면했을 뿐이지. 아니, 외면하도록 배운 그대로 했을 뿐이야.

 

 

 

세상의 모든 앤트걸에게

 

greg-raines-63369널 응원해, 언제 어디에 있든

 

 

처음에 나는 고백했어. 나 역시 용기를 내지 못하는 앤트걸이라고. 아직도 정글짐에 올라가기보다는 종이접기를 좋아하고 틀림없이 자격 미달인 채용 공고엔 눈길조차 주기 두려워. 그러나 내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안전하고 완벽한 방법으로 사는 앤트걸로 남는 걸 선택했었다면 이런 글은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감히 말할게. 난 희대의 작가도 아닐뿐더러,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아주 조그만 관심이 있고, 내 이야기조차 내 일기에 솔직하게 적지 못하는 평범한 여자애니까.

 

그렇지만 나는 나와 다른 앤트걸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우리는 완벽하지 않고도 용기를 가질 자유가 있다고. 형편없는 수학 성적에도 수학 경시대회에 나갈 수 있고, 아무도 지지하지 않을 게 뻔한 반장 선거에도 나갈 수 있는 자유. 단지 내가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과 머리를 고르고 밝게 웃으며, 나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이 느껴지는 사람을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유. 개미처럼 자기 몸보다 더 큰 꿈을 등에 지고, 자기 몸보다 더 큰 용기를 등에 져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자유.

 

앤트걸들은 언제나 있을 거야. 내 마음속에도, 내 주위에도, 전 세계 어디에도. 앤트걸, 난 널 응원해. 완벽의 덫에서 벗어나 완벽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너를. 끊임없이 도전하는 빛나는 너를.

 

 

 

2017 써니블로그크레딧_정다현 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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